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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프랑스 한 여성이 파리의 패션 거리 캉봉가에 자신의 가게를 연다.

이 여성의 이름 가브리엘 샤넬. 샤넬의 창업자이다.

샤넬이 문을 연 가게는 모자가게로 샤넬 특유의 심플함이 특징이었다.

때문에 화려함을 중시하던 상류층 여성들에게는 외면받기도 했으나,

당시 유명한 연극배우가 샤넬의 모자를 착용하게 되면서 인기를 얻게 된다.

이후 모자 디자이너로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자신의 부티크를 열게 되는데,

이 부티크가 바로 '가브리엘 샤넬'. 현재의 샤넬의 시초가 되는 곳이었다.

 

샤넬, 전쟁 덕에 인기를 얻다.

샤넬의 브랜드가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 때였다.

전쟁으로 인해 남성 인구가 줄어들자 여성의 노동력이 중요해졌고

사람들은 화려하고 불편한 옷보다는 샤넬의 심플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선호하게 되었다.

샤넬의 옷들은 많은 인기를 얻으며 팔려나갔고, 브랜드로서 샤넬의 인지도는 단숨에 상승하였다.

 

샤넬 넘버 5

브랜드 인지도를 높인 샤넬은 향수 사업을 시작한다.

당시에는 한 가지의 향으로만 향수를 만들었었는데, 샤넬은 최초로 다양한 향을 배합하여 향수를 만들게 된다.

이 향수가 바로 그 유명한 넘버 5다.

비싼 향료였던 재스민을 기본으로, 80여 가지의 성분을 조합한 혁명적인 향수였다.

샤넬은 당시 향수 사업을 위해 러시아 황제의 조향사인 에르네스트 보와 함께 일했는데,

그가 제시한 샘플 몇 가지 중 다섯 번째 샘플을 선택하며 넘버 5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화려한 향수병이 유행이던 때, 실험실에서 볼법한 향수병 디자인으로 또 한 번 혁명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 향수는 샤넬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고, 많은 유명인사들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해지게 된다.

특히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던 마릴린 먼로가 넘버 5를 입고 잔다고 이야기하며 넘버 5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2차 세계대전과 샤넬의 죽음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파리가 나치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샤넬도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닫고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샤넬은 파리로 돌아와서 새 컬렉션을 발표한다. 

당시에는 남성 디자이너의 여성복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샤넬은 이들의 옷이 전혀 여성의 인체나 활동을 고려하지 않은 스타일이라고 비판하며, 보다 편한 옷들을 발표했다.

샤넬의 옷은 유럽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비판받는 한편, 미국에서는 현대 여성을 위한 옷이라며 호평을 받았다.

이때 출시된 옷이 바로 트위드 재킷이다.

트위드 재킷을 입은 모델

순모로 된 소재인 트위드로 만든 이 옷은 계절에 상관없이 여러 해 동안 입을 수 있어 많은 인기를 얻었고,

현재까지도 계속 판매되고 있는 샤넬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또한 1955년 2월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체인 손잡이가 달린 핸드백인 슬링백을 발표하였다. 

이 가방은 출시 날짜를 따서 2.55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샤넬은 1971년 1월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칼 라거펠트

창립자의 죽음 이후로 잠시 방황하던 샤넬은 또 한 명의 패션 거장 칼 라거펠트를 영입한다.

당시 기성복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칼 라거펠트의 영입에 많은 사람들은 불만을 표했지만,

첫 데뷔 무대에서 찬사를 받으며, 기존의 샤넬을 보다 캐주얼하고 젊은 이미지로 바꾸어 나가는 데 성공한다.

샤넬의 근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취향을 접목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브랜드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칼 라거펠트 덕분에

샤넬이 젊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샤넬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를 확고히 가지고 있는 브랜드가 되었다.

 

오늘은 브랜드 샤넬에 대해 알아보았다. 칼 라거펠트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앞으로 샤넬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흥미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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